나는 해혼후다

유하는 기원전 92년 7월 25일에 태어나 기원전 59년에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서한 역사상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황제로, 한 무제(유철)의 손자이자 창읍애왕 유박의 아들이다.
창읍왕 14년. 다섯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합계 14년간 왕으로 있었다. 창읍은 황하의 옛 물길(오늘날 산둥 하택)에 위치했으며, 서한 시기 매우 번영하고 부유한 지역이었다. 창읍왕의 봉국은 가구 수가 수만에 달했을 것으로, 후작의 봉읍보다 훨씬 컸다. 선성후 곽광조차 2만 호였으니, 창읍왕의 봉읍은 그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유하는 부친 유박보다 3년 더 오래 통치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황제 27일. 비록 재위는 27일에 불과했지만, 유하는 황제의 부절을 지닌 사자들을 사방으로 파견하고 조령으로 각 관서에 물자 징발을 명했다. 기록된 조처만 1127건에 이른다. 묘에서 출토된 전국 시대의 청동 항아리(缶)나 상말주초의 손잡이 달린 유(卣) 같은 국보급 유물 가운데 일부는, 이 짧은 황제 재위 기간에 징발·수집했을 가능성이 높다. 호박, 용호 옥패, 마노 등 극히 희귀한 장신구들도 황제 시기에야 비로소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재물일 것이다.
서민 10년. 유하가 폐위되어 서민이 되자 창읍국은 폐지되었다. 곽광과 상관황태후는 유하의 의식주를 보장하기 위해 탕목읍 2000호를 내리고, 옛 창읍국의 모든 재산을 상속하도록 허락했다. 2000호 식읍은 소규모 열후에 준하는 생활 수준이다. 이 10년 동안 그는 조정의 엄중한 감시 아래 예전만큼 사치하지 않았지만, 그 수입만으로도 상당한 부를 쌓았다. 맞이하여 세워졌다가 곧 폐해진 과정은 복잡한 정세 속에서 전개되었고, 즉위 27일 만에 폐위된 이유로는 세 가지가 거론된다. 첫째, “수신과 법도를 지키지 않고 음란히 행했다.” 둘째, 곽광이 조정을 장악해 “정사(政事)가 모두 곽광에게서 결판났다.” 셋째, 조정과 조야에 선제의 즉위를 암중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폐위 11년 후, 한 선제는 유하를 해혼후에 봉하였는데, 이는 친족으로서의 정과 더불어 그를 옛 근거지에서 멀리 떼어내어 부활을 막으려는, 겉으로는 영예이나 속으로는 강등인 정치적 책략이었다.
해혼후 4년. 선제(유순)에게서 해혼후에 봉해진 뒤, 유하는 고향 산둥에서 멀리 떨어진 유장군 해혼현으로 옮겨 4년간 봉역을 지켰다. 식읍은 처음 4000호로, 서민 시절의 두 배에 해당했고 중간 규모의 열후에 비견되었으나, 한마디 실언으로 3000호를 깎여 1000호만 남았다. 그 뒤 머지않아 유하는 세상을 떠났다.
한때 황제였고 신료들에게 쫓겨나기도 한 창읍왕. 38세에 자신의 “해혼의 땅”에서 생을 마친 유하의 짧은 일생은, 등롱처럼 화려하고도 급박했다.
한대의 장례 관념은 “사자여사생(死者如事生)” — 산 자를 섬기듯 죽은 이를 섬기는 것 — 을 중시하여, 생전의 삶을 반영하는 많은 기물이 부장되었다. 이 때문에 한묘에서는 매우 다양한 유물이 나와 피장자의 생전 삶을 엿보게 한다. 해혼후 묘에서는 편종·금·슬·소 등 예악 기물, 공자像とその生涯を描いた 칠屏, 바둑판, 각종 칠연과 먹, 수천 장의 죽간이 출토되었다. 또한 서주의 提梁卣, 동주의 청동 缶 등, 묘주가 수장했던 것으로 보이는 유물도 나왔다. 이 모든 것은 사서의 서술과는 다른, 교양과 풍류를 아는 군자 유하의 모습 —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역사적 진실 — 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게시일: 2025년 9월 9일 · 수정일: 2025년 9월 10일